[시니어 칼럼] 도봉구 노인대학, 황희(黃喜) 정승 유적지 문화탐방기

조진래 기자 2025-06-10 08:48:10

대한노인회 도봉 노인대학생 120여 명이 지난 달 23일 버스 3대로 나누어 타고 파주 장릉과 황희정승 유적지에서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현장학습을 가졌다.

황희는 고려 말·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었다. 개성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총명해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2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학록이 되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자문 기관에 근무한 정치적 배경이 있어 이성계의 부름으로 성균관 학관으로 출사해 형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거처 영의정부사에 이르렀고, 태종 대에도 국가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자신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복권시키면서 그에게 과전을 돌려주는 대단한 정치적 관용을 베풀었다.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에게서 가장 신망 받는 명재상이 되었다. 사후에도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다.


세종이 미복 차림으로 황희 정승 집에 갔을 때 방안에서 멍석을 깔고 먹던 밥상에 보리밥과 된장 고추밖에 없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파주는 황의 정승과 많은 관련이 있어 유적지가 되었다. 태종이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하다 결국 폐서인이 되어 파주에 유배되고 말년에 정계에서 은퇴 후 반구정을 지어 갈매기와 벗 삼으며 살아가 90세에 생을 마감한 곳이다.

이곳에는 그의 기념관과 방촌영당, 방촌 동상, 반구정, 그리고 주변에 황희 정승과 가족의 묘소가 있다. 유적지 영당은 탄신일에, 묘소 영당은 돌아가신 날에 유업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지역유림들이 매년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황희는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우의정 1년 등 총 24년의 관직생활 동안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세종의 성세를 이룩한 인물로,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오늘날 이러한 재상이 나와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정운일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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